내리막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제현주

난 처음에 내가 특별한줄 알았다. 어딘가 쉽게 정착하지 못하고 뿌리에 대한 혐오를 가지는 나를 보면서 나만의 문제이자 나만의 특별함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순간 내 주변에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여럿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점점 더 나타났다. 그리고 이는 더 이상 나만의 특별함이 아니었다. 이것은 우리의 시대상이었다. 세상은 점점 모든 방면에서 불안정성을 향해 더 빠른 속도로 내달렸고 그 빠른 속도를 거슬러 많은 사람들이 뿌리내려 저지하는게 대개의 현상이었지만 이런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모양은 점점 더 뚜렸해졌고 사람들의 뿌리들은 이 변화를 저지하기 점점 어려워졌다.

그리고 이제 그런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뿌리내리지 못하는 내게서 불안함을 발견하기 보다는 불안정한 흐름에 몸을 내어 맏기는 내 길의 확신 말이다. 나는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거대한 흐름을 따르는 대세의 선두에 선 사람이라는 확신에서 오는 안정감 같은 것을 말이다.

사람은 대개 ‘지나치게’ 윤리적인 사람을 옆에 두길 꺼린다. 오차장 같은 이가 보이는 열정 앞에 우리는 무언의 압박을 느끼며 죄책감을 강요당한다. 일이 곧 자기 자신인 사람 앞에서 우리는 초라함을 느낀다. 일이 돈벌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조하는 자신은 그 앞에서 속물이거나 게으름뱅이, 현실과 타협한 비겁자처럼 보인다. 누구도 그런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일상의 반경 안에 놓이길 원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위인전이나 자기 계발서에 등장할 때만 존경할 수 있는 법이다. 더구나 그런 이와 열정을 비교당하고 열심을 경쟁해야 한다면 불편함이 분노로, 미움으로 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나는 인간 욕구의 총량을 줄일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하나의 욕구를 다른 욕구로 대체할 수 있을 뿐이다. 욕구를 대체하려면 삶의 다른 배치로 들어가야 한다. 저비용 구조로 자신의 욕구를 재편하고 싶다면 다른 장소와 다른 관계망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일상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는지, 어떤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지가 우리 욕구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 다른 종류의 활동을 하고, 다른 종류의 관계를 맺고, 다른 종류의 경험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다른 종류의 욕구가 생길 리 만무하다.

그들은 “모두에게 임금 노동의 형태로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개념은 좋게 봐주어도 순전한 유토피아적 발상이며, 나쁘게 보면 위험한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일을 고용 중심으로 규정하는 산업 시대의 사고방식에서 이제 벗어나야 한다. 일의 규정을 고용시장 바깥에서 벌어지는 활동까지 아우를 만큼 넓히지 않는다면 ‘고용 없는 성장’ 시대를 극복할 방법은 없다. 이를 위해서는 복지에 대한 새로운 정의, 일에 대한 새로운 보상 체계가 필요할 것이다.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지점이다.

일을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을 때 비로소 일과 놀이의 경계를 지우는 사치를 누려도 좋은 것이 아닐까. 결국 ‘객관적’ 보상이 크게 필요 없는 사람에게만 놀이 같은 일이 허락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돈이 좀 있어야 마음껏 놀듯이 일할 수 있다는 말이다. 놀이 같은 일의 첫 번째 함정이다.

정체성이란 내가 생각하는 나를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상이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적어도 나는 롤다에서 기꺼이 돌려받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내가 준 것과 돌려받을 것이 등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니, 애초에 등가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혼자라면 이 일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 유효한 질문은 이것 뿐이다. “등가성을 그만 따지게 될 때만 우리의 관계는 뿌리를 내릴 것이다.” 그제야 우리는 모두 일안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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