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재능을 타고 났고 어딜가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사람,
하고자 하면 충분히 사람들의 기준에서 성공할 수도 있는 사람이지만,
크눌프는 그 어디에도 얽메이지 않고 늘 곳곳을 방랑하는 삶을 산다.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결혼하고, 자식을 기르는
그런 편안한 삶을 거부하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안타까워한다.
여기에 이 책의 화두가 있다.
세상엔 누구나 바라는 전형적인 시민의 삶.
돈 많이 벌고 좋은 직장 얻고 가정 잘 꾸리고 잘 사는
그런 삶을 쫓는 사람이 있고
무언가 이와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 다르다는 모습은 여러가지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사느냐며 조롱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크눌프의 삶은 작가, 헤르만 헤세 본인의 삶에 대한 투영이었고
본인이 동경하는 모습이었다.
헤세는 책의 후반부에서 신을 대변해 이렇게 말한다.
“보아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어리석은 일을 하였고 조롱받았다. 네 안에서 바로 내가 조롱을 받았고 또 네 안에서 내가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자녀요, 형제요, 나의 일부이다. 네가 어떤 것을 누리든, 어떤 일로 고통받든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했었다.”
헤세는 그러한 사람의 삶에도 분명 신의 입장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고
따라서 자신의 방식대로 사는 그 사람들도 우리가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최근의 나는 사색을 다소 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면 무언가 나는 보통과 다른 사람일까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떄론 그렇게 우쭐해져서 저 사람은 왜 저러고 살까 하는 생각을 가지기도 한다.
그러한 생각을 불러 일으키는 대상은 보통 그냥 평범하고 안이한 삶들인 경우가 많다.
우리들 각자의 모습은 다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각자 살아야 할 방식으로 살 뿐인데 누가 누구의 삶을 평하는 걸까
크눌프와 같은 특별한 삶은 물론이고
평범한 시민적인 삶도 분명 가치 있는 것이다.
마치 내가 살아 가는 방식이 무언가 우월하다는 듯한 행동은 금물이다.
어쩜 그들과 내가 다르게 산다는 생각 조차 오만일지 모른다.
헤세는 그렇게 100년이란 시간을 지나 지금의 나에게 이야기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