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번째] 자존감

자존감을 키운다는 것이 나를 높인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를 군중속의 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하게 되는 행동, 내가 받게 되는 행동에서 나를 분리하고 군중속의 나와 그 행동만 남기는 것이다. 우리는 군중속에서 군중이 하는 일에 덜 자책하고 덜 기뻐한다 – 내가 직접 혼자 한것에 비하면.

사실 나라는 사람은 세상속에서 만들어진다. 세상과의 상호작용 속에 내가 존재한다. 다른 세상에 내가 있었다면 전혀 다른 내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세상은 지금 내가 바라 보는 것 뿐만 아니라 그 동안 겪어온 온 기억들을 포괄한다. 내가 그 세상과 상호작용을 통해 태어났음을 인식할때 비로소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다. 그러면 나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들을 모두 나에게서 분리하고 나를 비하하는 파괴적인 행동을 그만 둘 수 있다. 또 나를 남보다 높이는 오만을 피할 수 있다.

나를 내가 속한 세상과의 상호작용으로 존재하는 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나를 그대로 인정하라는 말은 이것에 가까웠다.

[21일차] 피켓

피켓을 들고 길위에 나섰던 그날 내가 깨달았던 한 가지는 이것이었다. 아무리 길위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미친짓을 할 지라도 내 곁에 나를 지지해 주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나는 기꺼이 용기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들이 하나가 아니라 두 명 세명이 되었을때 남은 부끄러움 조차 사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과거에 모두가 미친짓이라고 부르는 짓을 해야 했을 때, 그것을 해야 하는 당위성이 이미 내안에 있다면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나를 지지해 주는 단 몇 명의 사람들이었다. 그 몇 명이 내가 미치지 않았음을 긍정해 주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나를 부정하는 짓을 그만 둘 수 있었다.

우리가 삶의 이유를 자신의 외부 어딘가에서 찾지 않는다면 남은 이유는 진정 나 자신을 살아내는 것에 있다. 다만 그 삶은 때로 잘 닦인 길을 벗어나 나를 인도한다. 나 혼자 어딘가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은 나를 특별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나를 파괴시킬 수도 있다. 바로 그때 나를 지지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 여기 분홍천과 오픈 컬리지가 나에게 의미있는 한 가지 이유이다.

[20일차] 다혜

다혜라고 했다. 떨리는 맘으로 들어선 그곳에서 이름표를 붙이고 있는 그 아이를 한 눈에 포착한다. 내가 다가가자 부끄러운듯 빙글 도망가더니 이내 손을 내어준다.
하루종일 다혜에게 시달린다. 아이는 보는 사람마다 말을 걸고 툭 치고 시비를 건다. 그런 아이가 혹여 내게서 떨어져 잘못될세라 나는 붙잡은 손을 놓아줄 줄 모르지만 그럴수록 다혜는 더 달아났다. 결국 다혜가 나를 손으로 밀쳐내자 나도 그제야 놓고 적당한 거리에서 은근히 지켜본다. 지켜보는 내 마음은 서운함과, 질투와, 분노와, 걱정과, 자책이 곂쳐진다. 하지만 다혜가 다시 돌아와 손을 잡아주었을때 내 마음은 눈 녹듯 한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지치지 않고 웃는 아이를 바라보며 나도 미소를 짓는다. 우리 곧 헤어지는 구나 라고.

나는 어쩌면 나이를 먹어가는게 아니라 잃어가는 것이었다. 그 눈부신 나를 덜고 덜어서 어둠으로 사라질때 까지.

[19일차] 혁명가

모두가 혁명가일 필요는 없지 않냐고 말을 한다.나도 거기에 한 때 동의했던 것 같다. 나는 지금 내자리에서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 된다고 말이다. 이 말이 어딘지 모르게 비겁해 보이는건 일단 제껴두자. 지금 나는 우리 모두가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왜냐면 우린 사실 우리 개개인의 삶의 혁명가가 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으니까. 이 세상에 나온 이래로 우린 항상 우리 밖의 낮선 존재들과 마주하면서 자신의 안전한 영역 밖으로 꾸준히 개척해 나왔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낡은 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은 받아들이는데 이것은 본질적으로 혁명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삶의 혁명가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삶의 공간이 더 나은 곳이 되는 것이 어떻게 개인의 혁명과 상관이 없을 수 있을까?

[18일차] 고기를 먹으며

고기를 먹었다. 끊은지 겨우 9일만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피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못먹을 물건을 억지로 입에 쑤셔넣으며 생각한다. 고기를 끊겠다는 신념이 처음에 고기를 끊기로 결심했던 이유를 흐릴 수 있다는 것. 고기 끊기가 고기 섭취의 사회적 문제 때문이 아니라 도전 자체에 대한 만족감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 . 오히려 고기를 그 동안 한 점도 입에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깸으로서 고기 끊기가 무언가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양 신성시 하는 걸 막을 수 있겠다는 것.
우리는 흔히 일을 처음 시작했던 목적은 잊어버리고 가고 있었으니까 계속 가게 되는 경우가 있다. 가끔은 하는 일에 완벽을 기하기 보단 거기에 때가 한 점 묻어 있는게 그 본질을 기억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나의 고기 끊기는 계속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