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udade 외 1편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움 뿐만 아니라 슬픔이나 두려움도 항상 함께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무슨 말이냐면, 정말로 아름다운 소녀가 하나 있다고 해봐. 만일 지금이 그녀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고,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녀가 늙을 것이고 죽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모른다면, 아마도 그녀의 아름다움이 그렇게 두드러지지는 않을 거야. 어떤 아름다운 것이 그 모습대로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것도 기쁜 일이겠지. 하지만 그럴 경우 난 그것을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할걸. 이것은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는 것이다, 꼭 오늘 보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야. 반대로 연약해서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난 그것을 바라보게 되지. 그러면서 난 기쁨만 느끼는 게 아니라 동정심도 함께 느끼게 된다네. – 크눌프, 헤르만 헤세

그래서 사직서를 제출한 마지막 퇴근길이 그렇게 아쉬웠던 것이고, 전학 가던 날 버스에서 느끼던 향수가 아직까지 생생한 것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기억은 늘 여행중의 감정보다 짙었던 것이야. 결국 대상이 어떤 것이었던간에 대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이것들이야 말로 아름다운 것들이지 않나 해.

 

방랑은 향수와 같다

왜 걷는지 알지 못한다
어디서 부터 시작했는지
어디로 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 언저리의 조각들을 더듬어
고향의 향수를 찾는다

그 때부터였을까
그 사람이었을까
이 방랑의 시작은

고향을 찾아 떠나거나
고향이 좋아 머물거나
모두 고향을 찾는 향수의 길

우리는 고향에 가기 위해
오늘밤 이곳에 머문다

내일밤은 너는 너의 집에서
나는 나의 길위에서
향수에 젖은 밤을 지새운다

겨울

떠나는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얼버무렸다. 홀로 취해 얼음 바람에 맞서 우뚝 서본다. 가슴에 응어리 찬 무엇을 뱉어보려 신음하는데, 사실은 행복을 느끼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의 불안은 행복과 닿아있었던가. 나는 평생 고독을 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

마음에 혼자라는 생각이 들이칠 때면, 무언가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면 때론 그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바다 위로 몸을 던지는 것이다.

잠시 따뜻하다가, 잠시 소란스럽고, 다소 지나친 뜨거움이 지나고 나자 세상은 다시 홀로인듯 하다. 지난 소란들은 잠시 입었다 벗는 계절의 외투였나. 겨울은 벌거 벗는 계절이다.

겨울이 나의 기원인건, 내가 겨울에서 왔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문득 지난 겨울의 뜨거웠던 기억이 아득하다. 나는 지난 따뜻한 계절들 사이에서 얼마나 희석되었나.

어쩌면 사람은 나이들며 배워 가는게 아니라 희석되어 가는 것이다. 털이불은 털을 날리고, 꽃잎은 흐트러지고, 우리 관계들은 닳아져서, 결국 모든건 먼지로 수렴한다. 그게 요즘 서울에 먼지가 가득한 이유.

금기는 아름답다

금기는 꼭 깨어야 하는 존재인가? 그냥 처음 상태 그대로, 신비로운 모습으로 두면 안되는 걸까? 이것이 우리가 더 이상 배우기를 포기하고 무지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그것이 금기임을, 그리고 껍데기임을 인식하는데서 멈추면 안되느냐는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어떤 금기는 깨더라도 어떤 금기는 깨지 않고 남겨두면 안되는 것일까? 왜 우리는 모든 신비로움을 정복하고 더 이상 찾아볼 신비로움이 없는 상태로 만들지 못해 안달인 것일까?

나는 문득 여기서 현대사회를 이끄는 끝없는 경제 성장의 프레임을 떠올린다. 회사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면 주가, 즉 그 회사의 미래 가치는 떨어진다. 단지 지금의 수익을 유지하는 것 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이미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리고 있음에도. 그래서 회사는 끊임없이 사업을 확장하고 대기업들은 모든 분야 곳곳으로 뻗어나간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사무엘 울만의 시 ‘청춘’은 무한한 배움과 성장에 대한 예찬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끝없는 배움만 있다면 누구나 청춘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끝없이, 그래서 죽음이 내일이라도 끝없이 성장하는 것만이 옳은 것인가? 우리가 말하는 그 성장이란 것들은 가령, 경험하지 않은 것을 경험하고,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고, 두려움이나 거부감이 드는 것을 극복하는 것들일텐데, 과연 그것이 긍정적인 것만을 우리에게 주는 것인지 나는 의문이 든다.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았을때 그 동안 꽤나 신념과 금기들을 깨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어느 순간 내가 느끼게 된 것은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었다. 나는 내가 안다고 생각한 것들을 설명할 수 없었다.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말할 수 없었다. 금기는 끝없이 깨어져 나갔지만 결국 그 끝에는 인생에 대한 허무감만 있었을 뿐이다.

최근에 ‘내 사랑’이라는 영화를 재밌게 봤다. 손에 꼽을만한 많은 대사들이 있었겠지만 내게 유일하게 남은 대사는 ‘You need me’ 였다. 무엇이 나를 저사람이 아니면 안되게 하는 걸까. 그 제약조건을 깨는 것이 아니라 나는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자라오면서 많은 금기들을 주입받는다. 이건 해도 되고 저건 하면 나빠. 어느 때에 이르면 그 금기들을 스스로 깨는 시점이 오는데, 그것을 우리는 성장이라고 부르고 많은 사람들이 지속하도록 장려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나는 나만의 세계를 건설하고 싶다. 그 금기를 사회가 부여했으니 깨야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이 금기는 아름다우므로 지키고 싶다고 말이다. 물론 내가 집착하는 금기가 혹은 신념이 단지 어떤 관념일 뿐임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단순히 머리로 이해했다고 그 관념을 깨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나는 이것이 삶을 건강하게 살아내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집착이다.

노랑수선화 / 사랑에 답하여

던져진줄 모르는 목숨이
길위에 던져졌다

전신주 끝에 대롱 걸린 숨통을
간신히 부여잡았을 때
이전의 나는 죽고
또 다른 가능성의 나로서 건져진다

어제를 팔아 오늘을 살지않으려1)
주머니를 털어 길위에 쏟아버렸다

너는 없고 나만 있던 길이
나조차 없는 좌절이 될때
너의 손길이 나를 채운다

길위의 표지가 무시되고
역경의 때에 세상이 함몰되고
마침내 하나의 이야기로 맺어질 때
거기서 너를 발견한다

결국 다 사라지고 마는데
보이지 않는 것에서 찾지 않으면
어디서 너를 찾는단 말인가

1) “경계-박노해” 에서 발췌

꿈의 기억

눈을 뜨자 마자 노트를 적기 시작한지 419일째. 모닝페이지라는 이름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아침 일기가 되기도 하고 꿈노트가 되기도 한다.

작년에는 꿈속에서 하늘을 날아다닌다거나 가까운 사람을 안락사시키거나 비행기가 추락한다거나 하는 다소 극적인 장면들이 많아 나름 적는 재미가 있었다. 내 무의식 속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하지만 요즘엔 단순히 현실에서 내가 집중하는 일들이 꿈에 나타난다. 코딩을 한다거나 게임 속에 들어와 있다거나 회사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하지만 보통은 이마저도 기억해내지 못한다.

정신이 들자 마자 서둘러 손을 머리 위로 뻗어 불을 켜고, 눈은 뜨다 만채 노트를 더듬더듬 펼쳐낸다. 좀 전의 상황을 기억해 보려 애쓰지만 그러는 사이 기억은 점점 더 희미해지는 것 같다. 어떤 날은 전혀 기억해내지 못하지만 분명히 안다. 내가 꿈을 꾸었음을. 기억에 존재하지 않아도 그것이 거기에 있었다는 잔상은 분명하게 남아있다.

억지로 끌어내려는 내 꿈의 기억은, 애써 삶의 방향을 찾아내려는 내 부단함과 닮아있다. 확고한 꿈이 없으면 어딘가 불안하고 잘못 사는 것만 같은 느낌 속에서, 나는 선명한 삶의 목표를 갖는 대신 눈앞의 호기심들을 따라가는 삶을 살기로 선택한다. 그 호기심의 대상들은 내게 점차 경험으로 축적되어지다가 결국 처음엔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들로 연쇄되어 나타날 것이고, 그 끝에 내가 쫓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아주 어릴적 언젠가 한 번 꾸었던 꿈을 성인이되어 더듬어 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꿈은 먼저 존재하였고 나는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 잔상을 따라 더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