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의 독서

17살의 욕망연습,더블 A side, 크눌프,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랩걸, 동물 해방, 정확한 사랑의 실험, 힙한 생활 혁명,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사피엔스

호모데우스, 젊은베르테르의 슬픔, 수요일은 숲요일,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끌림-이병률,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인생의 발견,야간비행

모든 것이 되는 법, 태도에 관하여, 5가지 사랑의 언어,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지구인의 도시 사용법, 일하는 마음, 연예 정경,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멋진 신세계

기억에 남는 책

랩걸, 호프 자런

한 분야에 통달한 사람에게는 확실히 배울 점이 있다. 그리고 분야를 초월하는 공통적인 깨달음이 있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솔 앨린스키

급진주의와 온건주의 사이의 딜레마, 급진주의가 감정이 아닌 이성적 사고에 기반한다면, 절대적인 진리나 답이 없는 세계에서 원칙은 무엇일까, 급진주의가 소통하는 방법, 조직가(Change Maker)를 위한 규칙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제현주

일상의 사건들을 엮어서 언어를 부여하는 일에 어쩜 이토록 탁월할까.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하재영

누구든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개 식용 문제의 본질을 모르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내리막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난 처음에 내가 특별한줄 알았다. 어딘가 쉽게 정착하지 못하고 뿌리에 대한 혐오를 가지는 나를 보면서 나만의 문제이자 나만의 특별함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순간 내 주변에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여럿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점점 더 나타났다. 그리고 이는 더 이상 나만의 특별함이 아니었다. 이것은 우리의 시대상이었다. 세상은 점점 모든 방면에서 불안정성을 향해 더 빠른 속도로 내달렸고 그 빠른 속도를 거슬러 많은 사람들이 뿌리내려 저지하는게 대개의 현상이었지만 이런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모양은 점점 더 뚜렸해졌고 사람들의 뿌리들은 이 변화를 저지하기 점점 어려워졌다.

그리고 이제 그런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뿌리내리지 못하는 내게서 불안함을 발견하기 보다는 불안정한 흐름에 몸을 내어 맏기는 내 길의 확신 말이다. 나는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거대한 흐름을 따르는 대세의 선두에 선 사람이라는 확신에서 오는 안정감 같은 것을 말이다.

더 보기 “내리막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이완용 평전 – 이윤희 저, 한겨레출판

생각보다 나는 이완용에 대해 아는게 정말 없었다. 그냥 어릴적 부터 주입받은 이유없는 혐오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별로 내키지 않게도 책을 읽으면서 그를 이해하고 말았다. 그땐 그럴 수 있었겠구나. 그렇게 그의 입장을 이해하고 보니 그를 욕하기도 어려워졌다. 적어도 책을 덮기 전까지는…

추측하건데 이완용은 스스로를 돌이켜 부끄럼이 거의 없었을것 같다. 검소했고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자신의 신념에 맞추어 살았기에 감히 누가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했던 일이 어떤 평가를 받느냐를 떠나서 한 사람이 자신의 삶에 정성을 다해야 한다라는 가치를 믿는다면, 그리고 그러한 관점에서 그를 바라본다면 그렇다. 그는 오히려 웬만한 사람보다 자신의 삶과 신념에 헌신적이라고 느껴졌다.

그가 젊은 시절 짧은 미국 생활을 계기로 개화를 지향하고 다소 온건하지만 진보적 성향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내가 그에 대해 가져왔던 인상과는 꽤나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그가 국내로 돌아와 보인 행보에서 나는 그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중이 좀 더 깨우치고 높은 생활 수준을 갖게 되길 바라는 그의 마음만은 소중하지 아니한가. 그게 단순히 그의 상황과 행동들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보이진 않았다. 그는 꽤나 노력하는 듯 했다. 그런 그가 왜 역사에 그런 거대한 오점을 남기게 되었을까?

우선 그가 남겼다고 생각하는 그 큰 오점들, 즉,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에 서명한 사실 자체는그를 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보인다. 이미 대한제국은 존폐를 걱정해야하는 상황이었고, 그 역시도 역사에 오점으로 남을 서명을 하고 싶지 않았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왕에 대한 신의는 거의 절대적인듯 했고 그래서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였다. 오히려 그러한 상황에서 국가보다는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한 고종의 행태를 더 욕하고 싶을 뿐이다. 적어도 이 평전에서 나타난 이완용의 모습은 고종이 죽으라면 죽을 사람으로 보였으니까.

저자는 철저한 합리성에 포획된 그를 보면서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 온건주의적 진보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그가 고비마다 내려야했던 커다란 결정의 배경은 대단히 합리적이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받아들이고 거기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내리기 위해 노력한다. 오늘날의 기준에서 볼때 이것은 상당히 타당한 행동으로 보인다. 그리고 바로 그점에서 우리는 그의 행동들에 공감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합리적이라 보였던 선택들은 기본적으로 이상과의 괴리를 의미한다. 즉, 원하는 대한제국의 모습은 자주적인 독립국가이지만, 현재 상황이 이러하니 지금은 한 발짝 물러서서 그나마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최대한 많은 이익을 끌어낸다면 더 낫지 않은가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것이 그 한 번으로 끝났을때는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이런 태도를 견지하기 시작하면 계속 그러하기 마련이다. 결국 이완용은 독립국가라는 꿈을 포기하는 단계에 이르고 만다.

그가 내린 합리적인 판단에 깃든 이상과의 조그마한 간극은 쌓이고 쌓여 어느새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멀리 와버린 것이다. 의병활동을 일본인이 제압하는것이 큰 반발을 일으키니 대한제국인을 고용하여 의병활동을 가라앉힌다는 발상은 현 사태를 진정시키는데에는 합리적인듯 보였지만 결국 일제의 앞잡이를 만드는 시초가 되었을 뿐이었다.

이게 바로 온건주의가 주의해야 할 함정이다. 감정에 휘둘리기 보다는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판단하면서 충격을 최소화하고 천천히 바꾸어 간다는 것은 합리적이고 옳바른 듯 하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바라는 이상에의 순결을 깨는 것이다. ‘조금 신념에 맞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 조금 이렇게 참으면 결국은 더 나을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깨진 유리창 효과’ 처럼 결국 사람을 무너뜨리기 쉽다. 어느새 이완용은 최초의 신념과 방향으로 부터 멀리 와 있었고, 결국은 그것을 포기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완용은 이미 일본의 지배에 대해 어떠한 회의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일본 차관으로 대한제국이 개발되고 있었고, 강력한 일본의 무력이 대한제국을 전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앞서 순종의 순행 때 행했던, 일본의 지도를 받아 실력을 양성하는 길만이 대한제국을 보존할 수 있다는 이완용의 연설은 대중을 회유하기 위한 연설만이 아니었다. 이는 자신의 행동과 역할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최면이기도 했다.

분명 그는 손에 꼽을만큼 영민한 사람이었고, 그의 인간적인 고뇌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도 있었지만, 그를 용서 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가 가진 신념에의 순결은 스스로를 집어 삼키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지키기도 하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그렇다고 온건주의를 반대하고 급진주의를 지지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일상은 온건주의보다는 다소 급진주의 쪽에 치우쳐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완용의 주변에서 벌어진 사건들, 가령,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이후 거세지는 한일 합방론을 보면서 급진주의의 한계 역시 책은 보여주고 있다.

운명 – 임레 케르테스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 이 말은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

이밤, 나치 강제수용소의 이야기를 담은 ‘운명’이라는 책을 읽고 울컥거리는 감정을 다스릴수 없어 여기에 끄적여본다.

“중간에 서 있던 나는 10~20분 정도의 시간만 기다리면 곧장 가스실로 가게 될지, 아니면 다시 살아 날 수 있을지 결정이 내려지는 시점에 도달한다. 그런데 기다리는 중간에도 열은 계속해서 앞으로 움직이고 나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체 대열이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 큰 걸음을 떼든 작은 걸음을 떼든 조금씩 움직여 나간다. … 두 노인은 그게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고,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특별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다만 그러한 일이 단순히 ‘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리로 갔다’고 덧붙였다. 그런데도 마치 모든것이 갑자기 우리한테 그냥 ‘왔던’ 것처럼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모든 것이 그냥 지나간 것처럼, 끝난 것처럼, 변할 수 없는 것처럼,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불분명한 것처럼 그렇게 흐지부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살아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모든 관점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 나는 이어질 수 없는 나의 실존을 계속 살게 될 것이다. … 사람들이 완전히 자연스럽게 살아가지 못하는 부조리는 없다. 이제 내가 가게 될 길 위에 피할 수 없는 덫처럼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조차도 고통들 사이로 잠시 쉬는 시간에 행복과 비슷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악과 끔찍한 일에 대해서만 묻는다. 내게는 이런 체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도 말이다. 그래, 난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다음엔 강제 수용소의 행복이 대해서 말할 것이다.”

세상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부조리가 있지만 그 부조리는 결코 갑자기 다가와 우리를 덮치지 않는다. 그것에 가까워져 가는 과정에서 우리도 분명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 사람은 아우슈비츠 안에서도 행복과 지루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중요한건 지금 이순간에도 바로 1초전과 1초 이후로 시간은 흐르고 있고 거기에서 내가 하는 행동에 우리의 운명이 달려있다고 말하는 그 강인한 인내와 의지에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