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평전 – 이윤희 저, 한겨레출판

생각보다 나는 이완용에 대해 아는게 정말 없었다. 그냥 어릴적 부터 주입받은 이유없는 혐오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별로 내키지 않게도 책을 읽으면서 그를 이해하고 말았다. 그땐 그럴 수 있었겠구나. 그렇게 그의 입장을 이해하고 보니 그를 욕하기도 어려워졌다. 적어도 책을 덮기 전까지는…

추측하건데 이완용은 스스로를 돌이켜 부끄럼이 거의 없었을것 같다. 검소했고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자신의 신념에 맞추어 살았기에 감히 누가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했던 일이 어떤 평가를 받느냐를 떠나서 한 사람이 자신의 삶에 정성을 다해야 한다라는 가치를 믿는다면, 그리고 그러한 관점에서 그를 바라본다면 그렇다. 그는 오히려 웬만한 사람보다 자신의 삶과 신념에 헌신적이라고 느껴졌다.

그가 젊은 시절 짧은 미국 생활을 계기로 개화를 지향하고 다소 온건하지만 진보적 성향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내가 그에 대해 가져왔던 인상과는 꽤나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그가 국내로 돌아와 보인 행보에서 나는 그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중이 좀 더 깨우치고 높은 생활 수준을 갖게 되길 바라는 그의 마음만은 소중하지 아니한가. 그게 단순히 그의 상황과 행동들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보이진 않았다. 그는 꽤나 노력하는 듯 했다. 그런 그가 왜 역사에 그런 거대한 오점을 남기게 되었을까?

우선 그가 남겼다고 생각하는 그 큰 오점들, 즉,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에 서명한 사실 자체는그를 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보인다. 이미 대한제국은 존폐를 걱정해야하는 상황이었고, 그 역시도 역사에 오점으로 남을 서명을 하고 싶지 않았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왕에 대한 신의는 거의 절대적인듯 했고 그래서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였다. 오히려 그러한 상황에서 국가보다는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한 고종의 행태를 더 욕하고 싶을 뿐이다. 적어도 이 평전에서 나타난 이완용의 모습은 고종이 죽으라면 죽을 사람으로 보였으니까.

저자는 철저한 합리성에 포획된 그를 보면서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 온건주의적 진보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그가 고비마다 내려야했던 커다란 결정의 배경은 대단히 합리적이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받아들이고 거기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내리기 위해 노력한다. 오늘날의 기준에서 볼때 이것은 상당히 타당한 행동으로 보인다. 그리고 바로 그점에서 우리는 그의 행동들에 공감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합리적이라 보였던 선택들은 기본적으로 이상과의 괴리를 의미한다. 즉, 원하는 대한제국의 모습은 자주적인 독립국가이지만, 현재 상황이 이러하니 지금은 한 발짝 물러서서 그나마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최대한 많은 이익을 끌어낸다면 더 낫지 않은가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것이 그 한 번으로 끝났을때는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이런 태도를 견지하기 시작하면 계속 그러하기 마련이다. 결국 이완용은 독립국가라는 꿈을 포기하는 단계에 이르고 만다.

그가 내린 합리적인 판단에 깃든 이상과의 조그마한 간극은 쌓이고 쌓여 어느새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멀리 와버린 것이다. 의병활동을 일본인이 제압하는것이 큰 반발을 일으키니 대한제국인을 고용하여 의병활동을 가라앉힌다는 발상은 현 사태를 진정시키는데에는 합리적인듯 보였지만 결국 일제의 앞잡이를 만드는 시초가 되었을 뿐이었다.

이게 바로 온건주의가 주의해야 할 함정이다. 감정에 휘둘리기 보다는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판단하면서 충격을 최소화하고 천천히 바꾸어 간다는 것은 합리적이고 옳바른 듯 하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바라는 이상에의 순결을 깨는 것이다. ‘조금 신념에 맞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 조금 이렇게 참으면 결국은 더 나을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깨진 유리창 효과’ 처럼 결국 사람을 무너뜨리기 쉽다. 어느새 이완용은 최초의 신념과 방향으로 부터 멀리 와 있었고, 결국은 그것을 포기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완용은 이미 일본의 지배에 대해 어떠한 회의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일본 차관으로 대한제국이 개발되고 있었고, 강력한 일본의 무력이 대한제국을 전쟁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앞서 순종의 순행 때 행했던, 일본의 지도를 받아 실력을 양성하는 길만이 대한제국을 보존할 수 있다는 이완용의 연설은 대중을 회유하기 위한 연설만이 아니었다. 이는 자신의 행동과 역할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최면이기도 했다.

분명 그는 손에 꼽을만큼 영민한 사람이었고, 그의 인간적인 고뇌들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도 있었지만, 그를 용서 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가 가진 신념에의 순결은 스스로를 집어 삼키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지키기도 하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그렇다고 온건주의를 반대하고 급진주의를 지지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일상은 온건주의보다는 다소 급진주의 쪽에 치우쳐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완용의 주변에서 벌어진 사건들, 가령,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이후 거세지는 한일 합방론을 보면서 급진주의의 한계 역시 책은 보여주고 있다.

운명 – 임레 케르테스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 이 말은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

이밤, 나치 강제수용소의 이야기를 담은 ‘운명’이라는 책을 읽고 울컥거리는 감정을 다스릴수 없어 여기에 끄적여본다.

“중간에 서 있던 나는 10~20분 정도의 시간만 기다리면 곧장 가스실로 가게 될지, 아니면 다시 살아 날 수 있을지 결정이 내려지는 시점에 도달한다. 그런데 기다리는 중간에도 열은 계속해서 앞으로 움직이고 나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체 대열이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 큰 걸음을 떼든 작은 걸음을 떼든 조금씩 움직여 나간다. … 두 노인은 그게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고,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특별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다만 그러한 일이 단순히 ‘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리로 갔다’고 덧붙였다. 그런데도 마치 모든것이 갑자기 우리한테 그냥 ‘왔던’ 것처럼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모든 것이 그냥 지나간 것처럼, 끝난 것처럼, 변할 수 없는 것처럼,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불분명한 것처럼 그렇게 흐지부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살아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모든 관점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 나는 이어질 수 없는 나의 실존을 계속 살게 될 것이다. … 사람들이 완전히 자연스럽게 살아가지 못하는 부조리는 없다. 이제 내가 가게 될 길 위에 피할 수 없는 덫처럼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조차도 고통들 사이로 잠시 쉬는 시간에 행복과 비슷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악과 끔찍한 일에 대해서만 묻는다. 내게는 이런 체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도 말이다. 그래, 난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다음엔 강제 수용소의 행복이 대해서 말할 것이다.”

세상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부조리가 있지만 그 부조리는 결코 갑자기 다가와 우리를 덮치지 않는다. 그것에 가까워져 가는 과정에서 우리도 분명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 사람은 아우슈비츠 안에서도 행복과 지루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중요한건 지금 이순간에도 바로 1초전과 1초 이후로 시간은 흐르고 있고 거기에서 내가 하는 행동에 우리의 운명이 달려있다고 말하는 그 강인한 인내와 의지에 힘을 얻는다.

지옥은 신의 부재

책에는 다음 세명의 주요 인물들이 나온다.

닐: 현생에서 신의 존재를 아무데서도 찾을 수 없는 사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김으로서 신을 증오한다.
재니스: 끊임없이 삶에서 신의 의미를 찾는 사람. 주어진 것에 그냥 만족하고 머물기 보다는 그것에 신이 부여한 의미가 무엇인지 찾으려 애쓴다.
이선: 삶의 목표를 찾아 끝없이 방황하는 사람.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사명이 있을것이라 생각하고 그의 생애 내내 그 깨달음의 순간을 기다린다.

내가 이 책을 읽어가며 점진적으로 생겨났던 기대감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끊임 없이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을 조명하면서 그 것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들려주는 것.
2. 삶의 의미에 대한 고뇌를 하기 보다는 그러한 수고를 쉽게 종교에 맡겨버리고 거기서 해답을 찾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
3. 종교가 사실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논리로 납득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믿음이며 이것을 보여줌으로서 그것의 역설을 제시하는 것.

세번째의 기대는 책의 마지막에 가진 생각인데, 책은 아래와 같이 마무리 된다.

“그리고 신의 의식 너머에서 오랜 세월을 지옥에서 살아온 지금도 닐은 여전히 신을 사랑하고 있다. 진정한 신앙이란 본디 이런것이다.”

마침내 신에 대한 무조건 적인 사랑을 이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에 떨어진채 고통받는 닐에 대한 묘사이다. 거기에는 어떤 인간적인 논리도 없으며 그저 우연이 행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닐은 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므로 신을 여전히 사랑한다.

책을 덮으면서 잠정적으로 내렸던 결론은 나의 세번째 기대처럼, 종교가 사실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논리로 설명될 수 없는 신에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며 이것을 작가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였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참고해 보았지만 나와 비슷하게 내린 결론을 찾을 수는 없었다.

나는 예전부터 종교란 존재는 사람들이 삶에 대한 고뇌의 짐을 쉽게 그들에 내맡기고 자신들의 삶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는 존재라는 생각을 해왔다. 물론 여기엔 긍정적인 효과도 분명 있겠지만 이것은 내게 메트릭스에서 빨간약 대신 파란약을 먹는 행위와 비슷하게 여겨진다.

물론 이러한 태도가 옳으냐 그르냐에 관한 부분은 개인적인 기준에 따라 다를 것이라고 보므로 여기에 딱히 뭐라고 이야기를 보태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 작가라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진 않았을까 싶었던 것이다.

작가는 정말 그의 작품을 통해 이러한 무조건적 신앙에 대한 예찬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단순히 대부분의 신앙심들이 이러한 이상적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에 목소리를 내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테드창의 그간의 다른 소설들에서 보여진 천재적인 상상력과 우월한 인간상에 대한 모습들을 보았을 때, 그는 혹시 오히려 우리가 납득하기 힘들 만큼 우연에 의존한 신의 행동들을 그려놓고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을 사랑하는게 진정한 신앙이라는 – 우리의 직관에 반하는 – 주장을 펼친뒤에 이래도 당신은 신앙을 가지고 싶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채식주의자

‘열정은 수난이다’
책에 수록된 작품해설이 내가 느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몸의 욕구에 따라 고기를 먹지 않으려는 사람도, 아득바득 고난의 삶을 버텨내는 사람도, 예술적 영감을 찾아 현실의 삶에서 도망친 사람도, 최대한 평범하고 튀지 않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도 모두 자신의 열정에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타인의 열정에 감염되지 않겠다는 역설적인 열정, 즉 냉정의 열정이 그의 열정이었다.” – 작품해설중

하지만 나는 열정을 믿는다. 마냥 편안하고 즐거운 삶은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다. 나는 내가 추구하는 것을 위해 나를 소모하고 소진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살아있음을, 살았었음을 나타내는 유일한 증거이므로.

더 보기 “채식주의자”

함수형 사고 (Functional Thinking) – 닐 포드

1.
객체지향의 틀안에서 느꼈던 갈증을 해결해 준는 책. 이 책만 읽는 다면 함수형 프로그래밍이 마침내 찾아낸 유토피아 같겠지만 모든 것에는 장단점이 있는법. 모든 문제를 하나의 언어로 해결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하나의 패러다임 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필요도 없는 것이겠지.

2.
객체지향은 매번 새로운 자료구조(상태)를 만들어내지만 이는 각 상태에 대한 별도의 조작함수를 매번 제공해야 하므로 복잡도가 높아진다. 함수형은 리스트, 맵과 같은 보편적인 자료구조를 기반으로 이를 조작할 수 있는 다양한 함수를 만드는 방식으로 접근하여 재사용이 쉽다.

3.
객체지향에서 상속으로 추상화된 한계로 인해 특정기능을 다룰 수 없게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섣부른 추상화로 인해 다시 구조를 바꾸겠다고 리펙토링을 하며 새로이 만들어낸 추상화는 또다른 한계를 결정짓곤 한다. (조엘이 말하는 허술한 추상화의 법칙) 구성(Composition)을 기반으로 한 함수형 접근 방식에서 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보는 것 같다.

4.
함수형 접근방법이 해결한 3가지 갈증

a. 오류 처리: 예외도 맘에 들지 않았고, 리턴값처리도 맘에 들지 않았다. Either나 optional이 그 대안이 될 것
b. TDD에 쓰기 유용하다는 점: TDD에서는 다른 객체와의 연관성을 끊고 테스트 하기 위해 DI와 Mock을 사용한다. 이게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다. Functional에서는 애초에 주입할 state가 없다. 가급적 파급효과가 없는 함수들을 작성한다.
c. 도메인 특화 언어 사용의 편리함: 간단한 배치 스크립트를 대체하려던 파이썬 스크립트 조차도 루프가들어가고 자료형이 나오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연산자 오버로딩, 상속을 사용하지 않는 다형성(이를 통한 디스패치)들을 통해 구현이 간단해진다.

더 보기 “함수형 사고 (Functional Thinking) – 닐 포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