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 플라스틱 (Social Plastic)

소셜 플라스틱은 돈입니다. 전세계적으로 통용되고 거래가능한 통화죠. 그 통화를 사용하면 빈곤이 완화되고 환경이 깨끗해집니다. 단순한 재활용 플라스틱이 아니라 소셜 플라스틱 입니다.

Social Plastic is money, a globally recognizable and tradable currency, alleviates poverty and cleans the environment. – David Katz

플라스틱에 금전적 가치를 부여해서 재활용률을 올리고 가난한 국가를 지원하는 움직임이 있다. 그리고 일부 기업들은 이런 플라스틱을 사용함으로써 지지한다. 이런 플라스틱을 소셜 플라스틱(Social Plastic)이라고 부른다.

플라스틱의 해양 유입은 가난한 나라에서 더 심각하게 일어난다. 필리핀과 아이티는 그중의 한 예이다. 플라스틱 뱅크는 플라스틱을 구입하고 판매자에게 암호화폐를 입금해준다. 판매자는 그 화폐를 이용해 플라스틱 뱅크(Plastic Bank)의 지점에서 필요한 음식과 생필품을 구매할 수 있다.

플라스틱 뱅크가 구입하는 플라스틱의 금전적 가치가 우리나라의 기준에서는 적을 수 있지만 가난한 나라에서는 충분히 의미 있는 수입을 올릴 수 있다. 이 수입으로 이들 삶의 질을 개선하고 이렇게 구매된 플라스틱은 재활용됨으로써 플라스틱 쓰레기의 총량을 줄인다. 그리고 재활용에서 얻은 수입은 다시 이들 나라에 생필품을 공급하는 비용을 댄다. 이러한 모델의 도입으로 환경적 재앙을 막고 가난한 국가의 빈곤을 완화할 수 있다. 사회적 기업(Social Enterprise)들이 대개 그러하듯 기부금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한 것이다.

플라스틱의 해양 유입은 날이 갈수록 그 심각성이 더해지고 있다. 해양 생물들의 위장이 플라스틱으로 가득 찬 모습은 더 이상 환경단체의 연출이 아니라 실제가 되고 말았다. 이미 수많은 해양동물들과 새들은 뱃속에 플라스틱을 가득 채운 채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다. 어쩌면 현재로서 최선의 동물복지는 채식이 아니라 플라스틱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아마 이미 유출된 플라스틱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더 이상의 유출만은 막아야 한다. 세계 모든 국가들의 쓰레기 규제 및 관리 감독을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비즈니스 창출이다.

우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만을 강조하던 시대에서 사회적 기업(Social Enterprise)으로 이행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 사회적 플라스틱(Social Plastic)이 있다. 이러한 모델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선택이다. 똑같은 제품이더라도 사회적 기업이 만든 제품을 산다. 정부에게, 기업에게 책임 있는 제품의 생산을 요구한다.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행동한다. 그 어느 때보다 진정한 의미의 스마트 컨슈머가 필요한 시대이다.

우리가 사는 모든 것들은 그것을 만든 회사와 그것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Every purchase you make is a vote for how a product was made, and for the company who made it. – Shaun Frankson

Photosynthesis

지난 주말 광합성이라는 보드게임을 플레이했다. 이 게임을 한 줄로 요약하면 빈 땅에 광합성을 통해 나무를 열심히 키우는 게임이다. 최근에 어느 식물학자가 쓴 랩 걸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거기서 묘사된 나무에 대한 내용과 이 게임이 그려낸 나무들의 성장 방식이 오버랩되면서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나무의 성장은 기본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햇빛을 받기위한 치열한 경쟁의 과정이다. 나무의 키가 큰 이유도 그것이고 사방으로 뻗는 가지와 이파리들도 거기에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보드게임에서도 마찬가지로 승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는 햇빛을 다른 나무들을 피해 더 받는 것이다. 그것은 주변의 어떤 나무보다 내 키를 키워서 달성할 수도 있고, 텅 빈 땅위에서 경쟁자 없이 좀 더 수월하게 달성할 수도 있다.

또 한 가지 이게임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태양이 계속 한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무들 주위에서 360도 회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지금은 햇빛을 받기에 불리해도 어느 순간에는 유리한 위치에 있을 수 있다. 게임의 승리를 위해선 이런 태양의 움직임에 맞추어 나무를 성장시키는게 중요할 것이다.

언뜻 보면 이 게임이 반영한 현실의 경쟁이라든가 시간에 따른 기회의 변화들이 눈에 띄겠지만 더 재밌는 부분은 따로 있다.

식물이 생장을 위해 필요한 자원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이 게임은 태양에너지 하나만을 다룬다. 플레이어는 큰 나무로부터 태양에너지를 축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사용해서 씨를 뿌리고 나무를 성장시킨다. 재밌는 것은 작은 나무는 주변의 큰 나무들에 둘러쌓여 있으므로 스스로 성장할 태양에너지를 얻을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큰 나무들이 축적한 태양 에너지의 소모를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랩 걸에서 인상적이었던 내용중에 다 자란 나무가 어떻게 작은 나무들을 키우는지에 대한 부분이 있다.

“어린 단풍나무는 몇 년 동안 성공적으로 주변의 영양분을 모두 싹쓸이를 해온 성숙한 단풍나무의 그늘에서 햇빛을 확보하는 투쟁을 벌여야 한다.

그러나 다 자란 단풍나무가 자손들에게 제공하는 한 가지 믿을 만한 부모의 사랑이 있다. 매일 밤 자원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자원인 물을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길어 올려 약한 어린 나무들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하루 더 버틸 힘을 얻는다. 어린 나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이 물 뿐만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고, 100년 후에도 그 자리를 지키는 나무가 단풍나무이려면 이 어린 나무들이 얻을 수 있는 도움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어떤 부모도 자식들의 삶을 완벽하게 만들어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돕는다.”

현실에서 큰 나무들이 깊은 뿌리를 통해 물을 길어 올리면 작은 나무들은 그 물을 먹고 자란다. 게임에서는 큰나무들이 높이 뻗은 키로 에너지를 모으면 작은 나무들은 그 에너지를 이용해 큰 나무가 된다.

이는 인간세상에서도 비슷하다. 대개의 사람들은 어느정도 나이가 차고 자리를 잡는다면 그럭저럭 혼자서 지내기에는 충분한 수입을 만든다. 그것은 그가 그 직장에서 혹은 자기 사업에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리를 잡으면 누군가 책임질 사람들이 생기고 그들을 지키기위해 그리고 길러내기 위해 자신이 벌어들이는 수입을 소모한다.

그런데 자리를 잡는 다는 것은 뿌리를 내리는 것과 매우 비슷해서 한 번 자리를 잡고 나면 더이상 새로운곳으로 이동하거나 다른 곳으로 뿌리를 뻗는 것이 매우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자리를 잡으려 노력하게되고 뿌리는 더더욱 깊어진다.

랩 걸에서는 큰 나무에는 깊은 뿌리가 있으니 수월하게 물을 길러오는 것처럼 묘사했지만 사실은 작은 나무가 물을 가져가는만큼 큰 나무는 더 깊은곳에서 물을 길러와야 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큰 나무는 뿌리를 점점 더 깊게 깊게 내려야만 할 것이고, 뿌리가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더 이상 어디론가 이동할 수 있는 자유는 포기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한 개체는 대체된다. 한 개체가 깊게 뿌리를 내린만큼 새로운 개체는 자라난다. 새로운 개체는 낡은 개체가 내려야 했던 뿌리의 깊이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깨닫지 못한 사실은 갈등의 뿌리가 되기도 한다.

그래도 여기 낡은 개체에게 한 가지 위안이 있다. 게임에서는 나무가 다 자라면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단계가 있다. 사실 그게 나무 성장의 목적이다. 게임의 승점은 오로지 자연으로 돌려 보내는 단계로서만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은, 단지 땅위에 자라 있는 나무는 승점을 주지 못한다.

여기 인생을, 아니 생명체의 육성과 순환을 다룬 게임이 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그렇게 지내고 있다.

나는 이 게임을 통해 내가 뿌리에 대해 가졌던 혐오들을 되돌아 보고, 내가 축적하는 양분들이 갈 곳에 대한 힌트를 조금 얻는 것 같다.

채식선호자

채식주의와 같이 무엇무엇’주의’ 라는 것은 일종의 신념이다. 채식주의의 경우 자신은 채식의 가치에 대해서 공감하고 따라서 육류를 멀리하고 채식을 식단으로 삼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신념에는 그에 대한 순결이 종종 따라오는데, 말하자면 고기를 한 점이라도 입에 넣으면 그 채식주의의 순결이 깨지니 나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따라서 강한 신념을 가진 채식주의자일 수록 그 신념의 순결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헌데 이는 ‘주의’라는 단어의 왜곡이다. 우리가 무엇무엇’주의’ 라고 말을 할때는 그것을 ‘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그것’만’을 한다고 뜻하지는 않는다. 채식주의에 단 한점의 고기도 허락하지 않는 비건 부터 어류를 섭취하는 페스코까지 다양한 단계가 있는 것을 보아도 이것은 일종의 방향성이지 어떤 정답이 정해진 순결의 지향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과도한 신념은 종종 많은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신념들을 가지고 사는 세상이고 이런 다른 신념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충돌은 불가피 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신념만을 내세운다면 그 신념은 무엇을 위한 신념인 것일까. 이는 여러 종교들의 일신론적 폭력성과 닮아있다.

자신이 채식주의라는 신념을 가지기로 했다면 그 신념에 대해 먼저 공감하고 스스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단 한점의 고기도 허락하지 않는 순결이 목표는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따금 이것을 혼동한채 폭력적인 말과 행동도 서슴치 않곤 한다. 어쩌면 우리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채식주의자라는 표현보다는 채식선호자라는 표현을 쓰는게 더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혹시 누군가 자신이 가진 신념을 고수하기 위해 과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신념의 뿌리가 자신의 욕구, 그리고 자신의 신념은 소중하며 지켜져야 한다는 자기애에서 비롯되지 않았는지, 또 그 모든 것들을 지지하는 또 다른 신념은 무엇인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금기는 아름답다

금기는 꼭 깨어야 하는 존재인가? 그냥 처음 상태 그대로, 신비로운 모습으로 두면 안되는 걸까? 이것이 우리가 더 이상 배우기를 포기하고 무지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그것이 금기임을, 그리고 껍데기임을 인식하는데서 멈추면 안되느냐는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어떤 금기는 깨더라도 어떤 금기는 깨지 않고 남겨두면 안되는 것일까? 왜 우리는 모든 신비로움을 정복하고 더 이상 찾아볼 신비로움이 없는 상태로 만들지 못해 안달인 것일까?

나는 문득 여기서 현대사회를 이끄는 끝없는 경제 성장의 프레임을 떠올린다. 회사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면 주가, 즉 그 회사의 미래 가치는 떨어진다. 단지 지금의 수익을 유지하는 것 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이미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리고 있음에도. 그래서 회사는 끊임없이 사업을 확장하고 대기업들은 모든 분야 곳곳으로 뻗어나간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사무엘 울만의 시 ‘청춘’은 무한한 배움과 성장에 대한 예찬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끝없는 배움만 있다면 누구나 청춘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끝없이, 그래서 죽음이 내일이라도 끝없이 성장하는 것만이 옳은 것인가? 우리가 말하는 그 성장이란 것들은 가령, 경험하지 않은 것을 경험하고,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고, 두려움이나 거부감이 드는 것을 극복하는 것들일텐데, 과연 그것이 긍정적인 것만을 우리에게 주는 것인지 나는 의문이 든다.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았을때 그 동안 꽤나 신념과 금기들을 깨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어느 순간 내가 느끼게 된 것은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었다. 나는 내가 안다고 생각한 것들을 설명할 수 없었다.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말할 수 없었다. 금기는 끝없이 깨어져 나갔지만 결국 그 끝에는 인생에 대한 허무감만 있었을 뿐이다.

최근에 ‘내 사랑’이라는 영화를 재밌게 봤다. 손에 꼽을만한 많은 대사들이 있었겠지만 내게 유일하게 남은 대사는 ‘You need me’ 였다. 무엇이 나를 저사람이 아니면 안되게 하는 걸까. 그 제약조건을 깨는 것이 아니라 나는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자라오면서 많은 금기들을 주입받는다. 이건 해도 되고 저건 하면 나빠. 어느 때에 이르면 그 금기들을 스스로 깨는 시점이 오는데, 그것을 우리는 성장이라고 부르고 많은 사람들이 지속하도록 장려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나는 나만의 세계를 건설하고 싶다. 그 금기를 사회가 부여했으니 깨야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이 금기는 아름다우므로 지키고 싶다고 말이다. 물론 내가 집착하는 금기가 혹은 신념이 단지 어떤 관념일 뿐임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단순히 머리로 이해했다고 그 관념을 깨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 나는 이것이 삶을 건강하게 살아내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집착이다.

30 Days of Happiness

2017. 2. 18 ~ 2017. 3. 18

 

뒤늦게 올리는 30일간의 기록.
회사를 그만두고 떠돌던 저때를 그리워야 할까 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