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의 이유

어떤 식물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계기는 스스로 죽을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즉, 더 이상 가망이 없을때 새 생명으로 새로운 시도를 만든다

시대에 거슬러 대안적인 삶을 사는 많은 사람들이 대가 끊긴채 생을 마치는 것이 때론 안타깝게 다가온다. 그들은 사실 그들 자신으로 이미 완성되었으므로 새로운 세대가 필요 없었던 것일까.

그들은 그들의 업적을 통해 세상에 영향을 줌으로서 단순히 자식을 갖는 것보다 훨씬 많은 영향을 남긴 것은 아닐까. 훌륭한 부모 밑에 단지 피를 물려받은 망나니들이 얼마나 많은가.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인류의 역사에 남을만한 훌륭한 사람이지만 남들보다 눈에 띄었기에 홀로 생을 마감하는 많은 경우를 발견한다. 반면 이상적인 어떤 사상보다는 체제에 순응하고 잘 적응한 사람들은 별 탈없이 살고 별 탈없이 후손을 남긴다. 이러한 자연 선택이 옳았던 것인가.

혹시 우리 인간이 오래도록 번영하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목표가 아닌 것은 아닐까.

뒤늦은자의 통곡

그토록 차갑던 나의 마음이 너를 발견한다.
그때 그렇게 묻어두려던 마음은
그 무겁고 차가운 힘은 어디로 사라졌나

내 마음엔 그 시절의 향수만이 남아있다.
그때에 돌보지 못한 부재의 존재가 덮친다.

우리가 사는 시간이 잠시 어긋나 있었을 뿐이라고
그래서 내가 너의 아픔을 만져주었고
너의 부름에 내가 기꺼이 화답해 달려갔었다고
어긋난 시간을 끼워맞추려는데

이 밤 나는 목놓아 울어본다
그렇게 너의 고통에 조금이라도 닿을 수 있을까
이것은 뒤늦은자의 통곡

마지막 신념

사실상 환경의 변화는 막을 수 없을것 같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얼까? 변화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진들 뭐가 슬픈 것일까? 침팬지가 다른 종들의 멸종을 지켜보며 슬퍼 할까. 가리왕산의 고목들이 그들의 터전을 스키장이 대신했을때 슬퍼했을까. 어차피 막을 수 있는게 없다면, 우리가 그저 지금 볼 수 있는 아름다움들을 보면서 흐름에 따라 서서히 사라지기로 하면 어떨까?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일까. 그 무엇에도 집작하지 말기. 기대하지 않고 실망하지도 않기. 하지만 그것은 또 무엇을 위한 비 집착인가. 비집착을 위한 집착은 옳은가?

사실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신념의 옷을 입고 있을 뿐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스님은 스님대로, 속세의 사람들은 그들대로, 환경주의자들 역시 그들대로,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고 흐름은 어차피 막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또 생각해보면 막아야 할 흐름이란 무엇일까. 자연적인 것은 대체 무엇이고, 인간적인 것은 왜 자연적이지 못하나.

자연주의는 사실 자연주의가 아닐지 모른다. 그것은 현재 지구를 지배하는 인류세(Anthropocene)를 저지하고 과거의 시대를 유지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신념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인류세가 없다면 그자리에는 무엇이 올까. 수십억년간 변화해온 지질학의 시대들은 누가 변화시켜온 것인가.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모든 진실이 거짓이라 밝혀지는 이 시대에서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고 고통에 공감 할 수 있다는 것. – 물론 이 역시 철학적으로 거짓이라 논증 할 수 있고 언젠가 정말로 거짓이었음이 밝혀진대도 이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그 문제를 해결 할 수는 없으니까.

어차피 탈출구가 없다면 우리가 지금 가진 이 감각들에 의존해 살아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고매한 진리와 신념이 우리가 당면한 위기의 탈출구는 아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자연적인 것이다. 우리가 가진대로 살아내기. 우리가 느끼는 것에 집착하고 원하는 만큼 힘껏 살기.

마지막

살아오면서 그동안 수없는 인연들을 떠내려 보냈다. 때로는 흘려보냈지만, 때로는 밀쳐 보냈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이별이라면 작별의 키스를 받고 보냈던 기억이다. 그 사람은 나에게 얼마만큼의 의미를 주었던 것일까. 가끔 그 사람 생각이 날 때가 있다.

하나의 인연은, 하나의 관계는 언제 종말을 맞이하는 것일까. 영화 ‘코코’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두의 마음에서 지워진다면 그때가 진짜 마지막일까. 마음에 남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관념으로만 남은 기억은 대상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사람의 모든 경험은 유전자에 기록된다고 한다. 그게 진짜 사실인지, 남는다고 해도 얼마나 남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믿고 싶은 게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나의 모든 시간과 기억들이 응축되어 후대에 전해진다는 생각은 낭만적인 구석이 있다. 그것은 나의 유전자는 나보다 앞서 살아온 모든 선조들의 생활과, 경험과, 환희와, 애씀들이 응축된 결과물이라는 뜻이고, 나는 그러한 응축된 생애들이 연결된 거대한 대열에서 한 점으로, 그리고 뒤따르는 모든 후대에 이르는 단 하나의 연결점으로 남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까지 해서 박제된 나의 기억과 대상들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결국 집착은 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CHAMONIX, FRANCE

불교에서는 억겁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결국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만난 것이 극히 작은 확률이었다고 해도, 어차피 시간이 무한하다면 언젠가 그 확률이 다시 발현될 수 있으니 이론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말은 우리의 모든 만남과 사건들을 평준화하고 모든 의미를 제거한다. 우리가 오늘의 만남을 수백 번 수억 번 반복할 수 있다면 그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은 우리의 지금 만남에 대한 모욕이다.

내가 다만 바라야 할 것은 이번의 마지막이 다른 어떤 마지막과도 구별되기를, 그래서 오늘의 만남이 오늘로서 끝난다고 해도 그것이 나의 정신이 간직하는 한 특별한 의미를 가지기를, 그리고 오늘 내가 가진 기억과 정신은 내가 가질 수 있는, 다른 누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정신들과도 구분되는 의미를 갖기를, 그럼으로써 의미와 의미부여의 체인은 끝없이 이어지기를,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는 삶으로서 영원히 이어가기를.

사랑에 빠지면 시를 쓰곤 했다

사랑에 빠지면 시를 쓰곤 했다

한 문장 한 문장 쓰고 지우는
그 조심스러움이 나의 마음 같아서

응축된 구절 구절들이
갈데 없이 응어리진 내 마음 같아서

그래서 시를 썼던가 보다
그래서 응어리로 뭉쳤던가 보다

꺼낼 줄 모르고
말할 줄 모르던 나는

시가 되었던가 보다
삶이 되었던가 보다

시는 말 못하는 이의 응어리인가 보다
그래서 사랑은 말 할 수 없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