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막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난 처음에 내가 특별한줄 알았다. 어딘가 쉽게 정착하지 못하고 뿌리에 대한 혐오를 가지는 나를 보면서 나만의 문제이자 나만의 특별함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순간 내 주변에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여럿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점점 더 나타났다. 그리고 이는 더 이상 나만의 특별함이 아니었다. 이것은 우리의 시대상이었다. 세상은 점점 모든 방면에서 불안정성을 향해 더 빠른 속도로 내달렸고 그 빠른 속도를 거슬러 많은 사람들이 뿌리내려 저지하는게 대개의 현상이었지만 이런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모양은 점점 더 뚜렸해졌고 사람들의 뿌리들은 이 변화를 저지하기 점점 어려워졌다.

그리고 이제 그런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뿌리내리지 못하는 내게서 불안함을 발견하기 보다는 불안정한 흐름에 몸을 내어 맏기는 내 길의 확신 말이다. 나는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거대한 흐름을 따르는 대세의 선두에 선 사람이라는 확신에서 오는 안정감 같은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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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신념

사실상 환경의 변화는 막을 수 없을것 같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얼까? 변화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진들 뭐가 슬픈 것일까? 침팬지가 다른 종들의 멸종을 지켜보며 슬퍼 할까. 가리왕산의 고목들이 그들의 터전을 스키장이 대신했을때 슬퍼했을까. 어차피 막을 수 있는게 없다면, 우리가 그저 지금 볼 수 있는 아름다움들을 보면서 흐름에 따라 서서히 사라지기로 하면 어떨까?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일까. 그 무엇에도 집작하지 말기. 기대하지 않고 실망하지도 않기. 하지만 그것은 또 무엇을 위한 비 집착인가. 비집착을 위한 집착은 옳은가?

사실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신념의 옷을 입고 있을 뿐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스님은 스님대로, 속세의 사람들은 그들대로, 환경주의자들 역시 그들대로,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고 흐름은 어차피 막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또 생각해보면 막아야 할 흐름이란 무엇일까. 자연적인 것은 대체 무엇이고, 인간적인 것은 왜 자연적이지 못하나.

자연주의는 사실 자연주의가 아닐지 모른다. 그것은 현재 지구를 지배하는 인류세(Anthropocene)를 저지하고 과거의 시대를 유지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신념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인류세가 없다면 그자리에는 무엇이 올까. 수십억년간 변화해온 지질학의 시대들은 누가 변화시켜온 것인가.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모든 진실이 거짓이라 밝혀지는 이 시대에서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고 고통에 공감 할 수 있다는 것. – 물론 이 역시 철학적으로 거짓이라 논증 할 수 있고 언젠가 정말로 거짓이었음이 밝혀진대도 이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그 문제를 해결 할 수는 없으니까.

어차피 탈출구가 없다면 우리가 지금 가진 이 감각들에 의존해 살아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고매한 진리와 신념이 우리가 당면한 위기의 탈출구는 아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자연적인 것이다. 우리가 가진대로 살아내기. 우리가 느끼는 것에 집착하고 원하는 만큼 힘껏 살기.

마지막

살아오면서 그동안 수없는 인연들을 떠내려 보냈다. 때로는 흘려보냈지만, 때로는 밀쳐 보냈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이별이라면 작별의 키스를 받고 보냈던 기억이다. 그 사람은 나에게 얼마만큼의 의미를 주었던 것일까. 가끔 그 사람 생각이 날 때가 있다.

하나의 인연은, 하나의 관계는 언제 종말을 맞이하는 것일까. 영화 ‘코코’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두의 마음에서 지워진다면 그때가 진짜 마지막일까. 마음에 남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관념으로만 남은 기억은 대상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사람의 모든 경험은 유전자에 기록된다고 한다. 그게 진짜 사실인지, 남는다고 해도 얼마나 남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믿고 싶은 게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나의 모든 시간과 기억들이 응축되어 후대에 전해진다는 생각은 낭만적인 구석이 있다. 그것은 나의 유전자는 나보다 앞서 살아온 모든 선조들의 생활과, 경험과, 환희와, 애씀들이 응축된 결과물이라는 뜻이고, 나는 그러한 응축된 생애들이 연결된 거대한 대열에서 한 점으로, 그리고 뒤따르는 모든 후대에 이르는 단 하나의 연결점으로 남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까지 해서 박제된 나의 기억과 대상들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결국 집착은 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CHAMONIX, FRANCE

불교에서는 억겁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결국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만난 것이 극히 작은 확률이었다고 해도, 어차피 시간이 무한하다면 언젠가 그 확률이 다시 발현될 수 있으니 이론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말은 우리의 모든 만남과 사건들을 평준화하고 모든 의미를 제거한다. 우리가 오늘의 만남을 수백 번 수억 번 반복할 수 있다면 그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은 우리의 지금 만남에 대한 모욕이다.

내가 다만 바라야 할 것은 이번의 마지막이 다른 어떤 마지막과도 구별되기를, 그래서 오늘의 만남이 오늘로서 끝난다고 해도 그것이 나의 정신이 간직하는 한 특별한 의미를 가지기를, 그리고 오늘 내가 가진 기억과 정신은 내가 가질 수 있는, 다른 누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정신들과도 구분되는 의미를 갖기를, 그럼으로써 의미와 의미부여의 체인은 끝없이 이어지기를,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그렇게 의미를 부여하는 삶으로서 영원히 이어가기를.

사랑에 빠지면 시를 쓰곤 했다

사랑에 빠지면 시를 쓰곤 했다

한 문장 한 문장 쓰고 지우는
그 조심스러움이 나의 마음 같아서

응축된 구절 구절들이
갈데 없이 응어리진 내 마음 같아서

그래서 시를 썼던가 보다
그래서 응어리로 뭉쳤던가 보다

꺼낼 줄 모르고
말할 줄 모르던 나는

시가 되었던가 보다
삶이 되었던가 보다

시는 말 못하는 이의 응어리인가 보다
그래서 사랑은 말 할 수 없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