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환경의 변화는 막을 수 없을것 같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얼까? 변화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진들 뭐가 슬픈 것일까? 침팬지가 다른 종들의 멸종을 지켜보며 슬퍼 할까. 가리왕산의 고목들이 그들의 터전을 스키장이 대신했을때 슬퍼했을까. 어차피 막을 수 있는게 없다면, 우리가 그저 지금 볼 수 있는 아름다움들을 보면서 흐름에 따라 서서히 사라지기로 하면 어떨까?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일까. 그 무엇에도 집작하지 말기. 기대하지 않고 실망하지도 않기. 하지만 그것은 또 무엇을 위한 비 집착인가. 비집착을 위한 집착은 옳은가?
사실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신념의 옷을 입고 있을 뿐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스님은 스님대로, 속세의 사람들은 그들대로, 환경주의자들 역시 그들대로,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고 흐름은 어차피 막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또 생각해보면 막아야 할 흐름이란 무엇일까. 자연적인 것은 대체 무엇이고, 인간적인 것은 왜 자연적이지 못하나.
자연주의는 사실 자연주의가 아닐지 모른다. 그것은 현재 지구를 지배하는 인류세(Anthropocene)를 저지하고 과거의 시대를 유지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신념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인류세가 없다면 그자리에는 무엇이 올까. 수십억년간 변화해온 지질학의 시대들은 누가 변화시켜온 것인가.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모든 진실이 거짓이라 밝혀지는 이 시대에서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고 고통에 공감 할 수 있다는 것. – 물론 이 역시 철학적으로 거짓이라 논증 할 수 있고 언젠가 정말로 거짓이었음이 밝혀진대도 이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그 문제를 해결 할 수는 없으니까.
어차피 탈출구가 없다면 우리가 지금 가진 이 감각들에 의존해 살아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고매한 진리와 신념이 우리가 당면한 위기의 탈출구는 아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자연적인 것이다. 우리가 가진대로 살아내기. 우리가 느끼는 것에 집착하고 원하는 만큼 힘껏 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