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열정은 수난이다’
책에 수록된 작품해설이 내가 느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몸의 욕구에 따라 고기를 먹지 않으려는 사람도, 아득바득 고난의 삶을 버텨내는 사람도, 예술적 영감을 찾아 현실의 삶에서 도망친 사람도, 최대한 평범하고 튀지 않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도 모두 자신의 열정에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타인의 열정에 감염되지 않겠다는 역설적인 열정, 즉 냉정의 열정이 그의 열정이었다.” – 작품해설중

하지만 나는 열정을 믿는다. 마냥 편안하고 즐거운 삶은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다. 나는 내가 추구하는 것을 위해 나를 소모하고 소진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살아있음을, 살았었음을 나타내는 유일한 증거이므로.

아래는 작품 해설중에서..

그녀가 남편과 함께 회사의 부부동반 모임에 가서 자신의 유두만큼이나 ‘두드러진’ 존재로서 자리를 지켰던 장면에서처럼. 법의 충실한 옹호자들은 법의 체계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이들이 품고 있을 법에 대한 불신을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범법자들을 부르는 수많은 세부 명칭이 있는 이유는 그들을 법의 어휘로 호명할때 그들이 지닌 불온성이 ‘이해가능한’ 대상으로 순화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지 고기를 먹고 싶지 않아서 먹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저 몸이 일러주는 대로 소박한 원칙을 실천했던 그녀에게, 사람들은 ‘채식주의자’라는 이름표를 달아주려 했다. 그녀의 시간과 그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누군가가 실천하는 행위와 사람들이 그것의 속성을 규정하는 행위 사이에는 결코 해소될 수 없는 간극이 굳게 버티고 있음을 지켜보게 된다.

주의 라는말은 대개 특정 대상에 대한 강력한 신념을전제로 한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채식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자연스럽게 ‘고기를 먹지 않는’ 방향으로 이끌렸을 뿐이다.

타인의 열정에 감염되지 않겠다는 역설적인 열정, 즉 냉정의 열정이 그의 열정이었다.

아래는 책 속에서..

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언제나 그게 거기 멈춰 있어. 이젠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덩어리가 느껴져. 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순종하며 살아온 그녀는 서서히 죽어가다 마지막 발악이 몸에서 일어나는 것 아닐까

신기하게도 우묵하고 비좁은 공간이야말로 서른 두 평의 아파트 안에서 가장 아늑하게 느껴지는 장소라는 사실을 그녀는 깨닫는다. (욕조안에서..)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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