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진화

그에게는 과도하게 의미를 찾는 버릇이 있었다. 여행, 일, 연애 모두 의미를 찾기 위한 시도였다. 어떤 대상이 갖는 의미는 그의 인생 전반에서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토록 그가 의미에 집착했던 것은 인생의 허무함에 대한 인식 때문이거나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저항 심리였다.

남자는 저 멀리 남반구의 유명한 섬으로 여행을 떠났다. 주변사람들은 막연히 부러워 한다.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남자의 여행을 동경하며 그의 여행기를 기대한다. 남자는 해줄 이야기가 없다. 그들이 기대하는 여행 경험은 남자에겐 없었다. 남자는 그곳에 거대한 자연을 보러 간 것도 아니었고 도시의 세련된 문화를 감상하기 위해 간 것도 아니었다. 그곳에서 이렇다할 친구를 사귀지도 못했으며 흔히 접하기 힘든 그곳만의 특색있는 음식을 먹어본 것도 아니었다. 남자는 그곳에서 배낭을 메고 산으로 강으로 일주일간을 꼬박 걸었다. 누군가에겐 평생을 꿈꾸는 유명한 트레일이었고 남자는 갖은 고생끝에 결국 완주했다. 남자는 스스로가 대견했고 자신이 남들과 무언가 다르다는 희열을 느꼈다. 그가 여행에서 가져온 것은 사진으로도 말로도 공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점에서 그는 고독하기도 했다.

남자는 회사를 그만 두었다. 나름 만족스러운 보상과 큰 스트레스 없는 업무 환경에 운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끝없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을 버틸 수 없었다. 이대로는 그럭저럭 배나 불리면서 아무일도 없이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 속에서 시간의 틈사이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무작정 비행기를 탔다. 안락했던 공간에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불안함 속으로 들어서고 있는 자신의 행동에 뿌듯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벌써 무엇인가 일어난것 같았고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큰 터닝포인트를 지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년 후 남자는 귀국해서 다시 괜찮은 직장을 잡았다. 훗날 자신의 일탈을 남자는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당시에 지불할 수 있는 모든 시간과 자원을 쏟아서 평생 간직해왔던 버킷리스트를 하나 지웠고 나의 자서전에 기록될만한 매우 값진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알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남자는 여자가 좋았다. 여자의 외모가 그리 뛰어 났던 것도 그와 유난히 말이 잘 통했던 것도 아니었다. 어딘가 조금은 모자란듯한 여자였지만 여자가 가진 색깔을 자신만이 유일하게 알아봐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여자가 특별하게 여겨졌고 남자는 자기 자신도 특별하게 생각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처음에 특별하게 느꼈던 것이 더이상 특별하지 않자 결국 여자와 멀어지게 되었다. 남자는 비슷한 방식의 만남을 몇 차례 반복하며 그때마다 어떤 특별함이 좋아서 그리고 그 특별함 때문에 그만두었다. 남자는 점점 슬퍼졌다. 결국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아무것도 다를 바 없다는 깨달음이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했다.

작은 것 하나를 위해 더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 남자는 좋았다. 작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이었고 남자가 그것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그것의 가치는 훨씬 커졌다. 남자는 그런 특별함에 집착했다. 그런 특별함을 남자가 하나씩 늘려 갈수록 스스로가 더욱 특별하게 여겨졌고 작았던 자존감은 점점 부풀려지는 것 같았다. 남자가 마침내 그 의미를 버리기로 결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남자가 습관적으로 부여하는 의미의 근거는 낭만성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을 상상해 내는 것이다. 처음엔 미처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자기 안쪽으로 향하는 것이었고 영원히 채울 수 없는 욕망의 근원이고 불행의 뿌리였다. 이미 수많은 세대가 반복하며 깨달아온 진리를 자신도 동일하게 반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그가 지독한 현실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정도 순수하다고 생각되는 느낌은 포기하게 되었다. 그도 결국 세상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를 깨달았고 동시에 이게 성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앞선 세대의 많은 이들이 그랬듯 그러한 성장은 다소 때 늦은 시기에 찾아오는 것 같았다. 마치 그것을 깨닫는것이 인생의 졸업 시험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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