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까지 내려놓지 못한 병이 바로 낭만성이다. 낭만성이 결코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적당히 현실에 맞출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만큼의 댓가를 치르게 된다. 그 댓가는 단순히 나에게서 머무르지 않고 상대까지 고통 속으로 몰아 넣는데서 문제가 있다. 알랭 드 보통 역시 과거에 나와 비슷했던게 아닌가 싶다. 그 역시 낭만주의자였으나 현실에서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켜 내놓은 것이 이 책으로 보인다. 그가 언급한 진보한 낭만적 비관주의가 그 일부이다.
처음엔 내가 동경하는 어떤 모습을 가진 사람에게 사랑에 빠지고 상대가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에게서도 한 두가지 결핍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더 이상 낮설지 않은 존재가 된 상대에게 그 결핍들은 치명적이다. 이렇게 어긋난 결핍은 내가 꿈꾸었던 낭만성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운이 조금 따른다면 새로운 연인에게선 그 결핍을 채울 수 있게 되지만 이내 새로운 결핍을 발견하고 또 다시 실망한다. 결국 수 많은 시도와 실패 끝에 완벽한 사람이 없다는 그 자명한 사실을 몸으로 깨닫게 되고 이제 이것은 단순 지식이 아니라 체화된 진리가 된다.
진보한 낭만적 비관주의는 더 이상 완벽한 사람을 찾으려는 시도를 중단한다. 나와 완벽하게 상보적 관계를 이룰수 있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인정한다. 진정으로 좋은 파트너는 나와 관심사를 얼마나 많이 공유할 수 있는가에 있지 않고 나와 상대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다. 낭만주의는 몇 스푼의 현실이 필요한 것이고 지나친 현실주의자 역시 몇 스푼의 낭만주의가 혼합되어야만 각자의 이상적인 삶의 모델에 부합할 수 있는 것이다.
책속으로
부끄러움과 충동 억제는 단지 우리 조상들과 절제의 종교들이 애매하고 불필요한 이유로 붙들고 있었던 것들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상수로 존재할 운명이다. 바로 그 때문에, 낯선이가 우리의 방어를 풀고, 한때 몰래 죄를 짓는 마음으로 갈망했던 것과 거의 동일한 것을 바랄 수 있게끔 허하는 그 진기한 순간들이 그렇게 큰 힘을 갖게 된다. (적당한 금욕은 그래서 의미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권태 대신 그것의 달콤함을 다시 맛보게 해주니) – 44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 116
자연은 우리에게 성공을 향한 집요한 꿈을 심어놓았다. 인류에게 그런 분발심이 내장된 데에는 분명 진화상의 이점이 있다. 부지런함은 우리에게 도시, 도서관, 우주선을 선사했다.
그러나 이 충동 때문에 개인의 평정은 충분한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인류 역사에서 천재의 몇몇 작품이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범인들이 매일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어떤 목표를 향해 매진해야 한다는 강박) – 267
정착을 하기 전에 몇 명의 애인을 사귀어 보는 것도 이 깨달음을 깊이 새기는데 도움이 된다. 제 짝을 만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은 없으며, 가까이서 보면 사실은 모든 사람이 조금씩 잘못되었다는 진실을 직접 그리고 다양한 상황에서 발견할 기회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 279
라비는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
1. 완벽함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 누구든 완벽한 만족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어떤 종류의 고통을 견딜지 선택하는 것 ( 진보한 낭만적 비관주의 )
2. 타인에게 완전히 이해되기를 단념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상대에게 이해받았다는 경험에서 사랑이 시작된다. 하지만 연인의 이해능력에는 적정 한계가 있고 언젠가 그 한계에 부딪히더라도 비관해서는 안된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며 그게 정상이다. 어떤 사람도 다른 누군가를 정확히 이해하고 충분히 공감하지 못한다.)
3. 자신이 미쳤음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 사람은 누구나 광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감지하고 인정했을 때에 우리는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다.
4. 배우자가 까다로운 것이 아님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 집안 살림, 친인척, 청소 분담, 파티등 사소한 일들로 인해 갈등이 생기면 배우자가 까다로운 것 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상대방의 허물이 아니며 삶의 속성인 것이다. 난감한 것은 결혼이라는 제도이지 관련된 개인들이 아니다. – 결혼제도의 한계를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일까
5. 사랑을 받기보다 베풀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 사랑은 매우 상이한 두 가지 양식인 사랑받기와 사랑하기로 이루어져 있다. 후자를 실행할 준비가 된 동시에 전자에 대한 우리의 비정상적이고 위험한 집착을 인식할 때 결혼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예측하고, 우리의 심정을 읽어내고, 이타적으로 행동하고 모든 면에서 더 나아지게 해줄 연인을 그린다. 이건 낭만적인것 같지만, 재난의 예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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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결혼관은 알맞은 사람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우리의 허다한 관심사와 가치관에 공감하는 사람을 찾는 것으로 인식된다. 장기적으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 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