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사랑의기술

갑자기 친밀해지는, 이 기적은 성적 매력과 성적 결합에 의해 시작되는 경우, 대체로 더 촉진된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 사실상 그들은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17

대부분의 사람은 일치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욕구조차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기호에 따르고 있으며, 자신은 개인주의자이고 스스로의 사고의 결과로 현재의 견해에 도달했으며, 자신의 의견이 사람들 대부분의 의견과 같은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환상속에서 살고 있다. – 30

즉 모두 동일한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각기 자신의 욕망에 따르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현대의 대량 생산이 상품의 규격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사회적 과정은 인간의 표준화를 요구하고 이러한 표준화를 ‘평등’이라고 한다. – 33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 38

(겉으로 드러난 활동과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그것의 동기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깊은 불안감과 고독감에 쫓겨 끊임없이 일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야망이나 돈에 대한 탐욕에 쫓겨 끊임없이 일한다. 이 모든 경우에 사람들은 열정의 노예이고, 그들은 쫓기고 있으므로 사실 그들의 활동은 수동적이다. – 39

시장형 성격의 사람은 주려고 하지만 단지 받는 것과 교환할 뿐이다. 그에게는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하는 것은 사기당하는 것이다. -40

주는 것은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준다고 하는 행위에는 나의 활동성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주는 것은 받는 보다 즐겁다. (그래서 사실 준다는 것은 나를 위한 행동이다. ) -41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기 자신,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 다시 말하면 생명을 준다. 이 말은 반드시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을 준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 –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의 모든 표현과 현시를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그는 타인을 풍요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의 생동감을 고양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고양시킨다. – 42

오늘날은 책임이 흔히 의무, 곧 외부로부터 부과된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책임은, 그 참된 의미에서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행동이다. 책임은 다른 인간 존재의 요구 – 표현되었든 표현되지 않았든- 에 대한 나의 반응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할’ 수 있고 ‘응답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 46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이바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란다. -47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성격의 방향이다. -69

어떤 사람이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머지 동포에게는 무관심하다면,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은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상에 의해서 성립된다고 믿고 있다. 사실상 그들은 심지어 그들의 ‘사랑을 받는’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사랑의 강렬함을 입증하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 69

사랑은 활동이며 영혼의 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단지 올바른 대상을 찾아내는 것만이 필요하며, 그렇게 되면 그 밖의 일은 모두 저절로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태도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면서도 기술은 배우지 않고, 올바른 대상만을 고르면서 대상만 찾아내면 아름답게 그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태도에 비유할 수 있다. – 70

형제애는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재능, 지능, 지식의 차이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인간적 핵심의 동일성과 비교하면 무시해도 좋을 정도이다. – 70

성애는 본질적으로 배타적이며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성애는 아마도 현존하는 사랑의 형태중 가장 기만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 77

이 경험은 다시금 차츰 덜 강렬한 것이 되고 마침내 새로운 정복, 새로운 사랑을 – 언제나 새로운 사랑은 이전의 사랑과는 다르리라는 환상을 품고 – 바라게 된다. 성적 욕망의 기만적 성격은 이러한 환상에 많은 도움을 준다. – 78

성적 욕망은 사랑에 의해 자극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의 불안에 의해, 정복하려는 또는 정복당하려는 소망에 의해, 허영심에 의해, 상처를 내고 심지어 파괴하려고 하는 소망에 의해 자극된다. -78

성적 욕망은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속에서 사랑이라는 관념과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서로를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79

우리는 성애의 중요한 요인, 곧 ‘의지’라는 요인을 무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강렬한 감정만은 아니다. 이것은 결단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다. 만일 사랑이 감정일 뿐이라면, 영원히 서로 사랑할 것을 약속할 근거는 없을 것이다. -81

만일 나의 이웃을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덕이라면, 나 역시 인간이므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어야 한다. -83

(비이기주의를 가진-보통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그에게는 사랑하는 능력이나 즐기는 능력이 마비되어 있고, 그는 삶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비이기주의라는 표면 뒤에는 미묘하지만 매우 강렬한 자기 본위가 숨어있다. – 87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88

신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말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신은 유한하지 않고 사람이 아니며, ‘존재’가 아님을 의미하고 있다. 이 문장의 가장 적합한 번역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곧 “그들에게 ‘나의 이름은 이름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하라” 헛되이 신의 형상을 만들지 말고 쓸데없이 신의 이름을 부르지말고 궁극적으로는 신의 이름을 전혀 말하지 말라고 금지하는 것도 동일한 목표, 곧 신은 아버지이고 사람이라는 생각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주려는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 96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신에 대한 신앙은 도움을 주는 아버지에 대한 신앙 ( 유치한 환상 )이다. -97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만일 그가 일신론적 관념의 본질에 따른다면, 어떠한 일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고 신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 그는 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있어서 겸손하다. -98

사랑, 이성, 정의의 왕국은 오직 인간이 이러한 능력을 자기 자신 속에서 인간의 발달 과정을 통해 발달시킬 수 있기 때문에, 또한 그 정도에 따라 현실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이 스스로 삶에 부여하는 의미 이외에 삶에는 다른 의미가 있을 없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돕지 않는 , 전적으로 외롭다. – 99

알면서도 알지 못한다고생각하는 최고의각성이고, 모르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병이다 – 102

인간은 오직 궁극적 실재의 부정적 측면을 알 뿐, 그 궁극적 측면은 알지 못한다. “한편 인간은, 비록 어떠한 것이 신이 아닌가를 잘 알고 있더라도, 신이 무엇인지를 알 수는 없다. – 104

세계를 궁극적으로 파악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고가 아니라 행위에, 곧 일체성의 경험에 있다. 이렇게 해서 역설적 논리학에서는 신에 대한 사랑은 사고를 통한 신에 대한 지식이거나 인간의 신에 대한 사랑에 관한 사상이 아니라, 신과의 일체성을 경험하는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105

더 나아가 종교적 태도의 주요한 목적으로서 ‘신에 대한 신앙’을 강조했다. 물론 이 말은 인간이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데도 신을 믿는 자는 – 비록 그가 신의 뜻을 좇아 살지 않더라도 -신의 뜻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신을 ‘믿지’ 않는 사람보다 탁월하다고 느꼈다. (난 기독교의 이점이 싫다) – 107

완전히 성숙한 단계에서 그는 보호하고 명령하는 힘으로서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해방된다. 그는 자기 자신 속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원리를 확립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다. (이것이 신이 내 안에 있는 경험) – 108

곧 어머니인 여신에 대한 무력한 애착으로서의 신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여, 아버지인 남신에 대한 순종적인 애착을 거쳐, 신이 이미 외부적 힘이 아니고 인간이 사랑과 정의의 원리를 자기 자신 속에 흡수하여 인간과 신이 일체가 되는 성숙한 단계에 이르고, 마침내 시적, 상징적 의미로서만 신에 대해 말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109

곧 잘 먹고 잘 입고 성적으로도 만족하지만 자아가 없고 가장 피상적인 접촉을 제외하고는 동료들과 어떠한 접촉도 없는, 헉슬리가 다음과 같은 말로 간결하게 표현한 슬로건에 의해 지도되고 있다. “개인이 감정을 가질 , 공동체는 비틀거린다.” 또는 “오늘 즐길 수 있는 일을 내일로 연기하지 말라.” 또는 절정에 달한 선언이지만 “오늘날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 – 120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러한 개념에서 중요한 강조점은 참아낼 수 없는 고독감으로부터 피난처를 찾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에서 마침내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안식처를 찾아낸다. 사람들은 세계에 대항하는 두 사람 사이의 동맹을 형성하고, ‘두 사람만의이기주의는 사랑과 친밀감으로 오해된다. – 122

“경험에 의해 성적(생식적) 사랑이 최대의 기쁨을 준다는 것을 알고, 그 결과 성적 사랑이 사실상 그의 모든 행복의 원형이 된 사람은 계속해서 성적 관계의 과정에서 행복을 찾고 생식적 에로티시즘을 자기 삶의 핵심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구나..) – 124

자본주의가 인간의 자연적 욕구와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인간은 본성상 경쟁적이고 상호간 적의로 가득 차 있음을 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학자들은 이 점을 경제적 이득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증명하고’, 다윈주의자들은 적자생존이라는 생물학적 법칙에 의해 ‘증명’했으나, 프로이트는 인간이 모든 여자를 정복하려는 무한한 욕망에 쫓기고 있고 오직 사회적 압력만이 이러한 욕망을 행동화하는 것을 저지한다고 가정함으로써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 – 125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의 힘의 생산적 전개에 바탕을 둔 동일성, 곧 자아를 인식하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우상화’하기 쉽다…. 이러한 우상 숭배적 사랑의 특징은 첫째로 강렬하고 갑작스러운 사랑의 경험이라는 점이다.  -134

사이비 사랑의 다른 형태는 ‘감상적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사랑은 환상 속에서만 경험될 뿐, 실재하는 다른 사람과 여기서 지금 맺고 있는 관계에서는 경험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러한 사랑의 본질이 있다. -135

감상적 사랑의 또 하나의 측면은 시간에 의한 사랑의 추상화이다. 부부는 그들의 지난날의 사랑 -비록 이 과거가 현재였을 때에는 사랑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더라도-의 기억이나 미래의 사랑의 환상에 의해 깊은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그들이 생활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이미 서로 싫증을 느끼면서도 얼마나 많은 약혼자, 또는 신혼 부부들이 미래에 있을 사랑의 축복을 꿈꾸는가? 이러한 경향은 현대인의 일반적 태도와 일치한다. 현대인은 과거나 미래에 살지 오늘을 살지 못한다. 현대인은 감상적으로 어린시절이나 어머니를 회상하고, 또는 미래에 대해 행복한 계획을 세운다. -136

불행한 결혼을 해소하려고 할 때에도 자식들이 투사의 목적에 이용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버이들이 흔히 벌이는 논쟁은 화목한 가정이 주는 행복을 자식들에게서 빼앗지 않기 위해서는 헤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자세하게 검토하면 ‘화목한 가정’안에 감도는 긴장과 불행의 분위기가 공공연한 결별보다도 자식들에게 더 해롭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공공연한 결별은 적어도 자식들에게 인간은 용감한 결정에 의해 참을 수 없는 상황을 종결시킬 수 있음을 가르쳐줄 것이다. – 137

두 사람이 서로 그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 – 138

현대인은 일하지 않을 때에는 게을리 지내거나 빈둥거리고 싶어하며, 더 좋은 말을 쓴다면 ‘긴장을 풀고’ 싶어한다. 게으름을 피우려는 이러한 소망은 주로 생활의 규격화에 대한 반발이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목적을 위해, 자기 나름의 것이 아니라 일의 리듬에 의해 그에게 지시된 방식으로 어쩔 수 없이 하루에 여덟 시간씩 자기의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반항하며, 그의 반항은 유아적 자기방종의 형태를 취한다. – 148

우리는 지식을 가르치지만, 인간의 발달에 가장 중요한 가르침, 곧 성숙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어질 수 있는 충분한 가르침을 상실하고 있다.(그러한 더 나은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158

사랑을 성취하는 중요한 조건은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아도취적 방향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만을 현실로서 경험하는 방향이다.(정반대는 극 객관성) – 160

사랑은 자아도취의 상대적 결여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사랑은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에 전 생애를 바쳐야 한다. – 162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고 한다면, 나는 모든 상황에 객관적이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내가 객관성을 잃고 있는 상황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나는 자아도취적으로 왜곡된 어떤 사람과 그의 행동에 대한나의상과, 나의 흥미, 욕구, 공포와는 관계없이 존재하는 나의 현실 사이의 차이점을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 162

이러한 (합리적)신앙은 자기 자신의 경험과 자기 자신의 사고력, 관찰력, 판단력에 대한 확신에 뿌리박고 있다. 비합리적 신앙은 오직 어떤 권위자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와 같이 말하기때문에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합리적 사고는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에도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생산적 관찰과 사고에 기초를 둔 독립된 확신에 뿌리박고 있다. –165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신앙을 갖고 있다. 우리는 변화할 수 없고 여러 가지 환경에도 불구하고, 또한 의견과 감정의 변화와 관계없이 생애를 통해서 지속하는 자아, 곧 우리의 퍼스낼리티의 핵심 존재를 알고 있다. ‘나’라는 말의 배후에 있는 실재는 바로 이러한 핵심이며 우리 자신의 동일성에 대한 확신은 이러한 실재에 바탕을 두고 있다. – 165

여론이나 예측하지 못한 몇 가지 사실이 자신의 판단을 무효화 하더라도 타인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고수하는 것, 자신의 확신이 인기가 없더라도 자신의 확신을 고수하는 것 – 이러한 모든 일에는 신앙과 용기가 필요하다. – 169

비록 자본주의의 원리는 사랑의 원리와 양립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더라도, ‘자본주의’는 그 자체가 상당한 불일치나 개인적 자유를 허용하는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하는 구조라는 점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175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