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열정이 늙은이의 여유가 되기까지 – 싯다르타, 헤르만헤세

책에 대한 평이 아니라
읽고 떠오른 생각을 써 내려가 보자.
(뭐… 항상 그랬지만)

이 책을 통해 마침내 헤르만 헤세 그의 전체적인 세계관을 맛본것 같다. 그 처음은 데미안에서 였지만, 그건 어린날의 방황기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여기서야말로 삶의 전체를 다루고 있다. 젊은 날의 열정에서 늙은이의 포용력과 유머로 어떻게 변해가는지.

1.

“누군가 구도를 할 경우에는 그 사람의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며 자기 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 (중략) 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 열려있는 상태, 아무 목표도 갖고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젊은이에게 열정은 소중한 재산이다. 하지만 때론 그 열정이 우리를 제한하기도 한다.
어느 순간 무언가를 향한 그 길만이 옳은 길로 보이기 시작하고 다른 것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된다. 일찍이 니체도 비슷한 언급을 했다.

“자신의 철학을 가지지 마라. 일반적으로 철학을 가진다 라고 말 할 경우, 어느정도 굳어진 태도와 의견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획일화하도록 만든다. 그런 철학을 갖기 보다는 때때마다 인생이 들려주는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것이 낫다.” – 니체

무엇을 할지 몰라, 무엇이 될지 몰라 불안에 떠는 젊은이들. 우리는 지금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그런 강요속에서 살고 있는건 아닐까

난 때론 인생의 목표가 불분명하다는 압박에 시달리곤 한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내 삶이 자유롭게 열려있을 수 있는 더 나은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 자체가 내 삶이 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고

2.
책 속에서 주인공 싯다르타는 평생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길을 걷는다.
일찍이 아버지의 곁을 떠나 자신의 길을 걸었던 그는, 훗날 제 길을 가겠다며 자신을 떠나는 아들을 보며 괴로워 한다. 그리고 한 가지 깨달음을 얻는다.

“아버지 또한 나 때문에, 내가 지금 내 아들 때문에 겪고 있는 것과 똑같은 고통을 겪었던 것은 아닐까? (중략) 이러한 반복은, 이처럼 숙명적인 순환의 테두리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도는 것은 한 바탕의 희극, 기이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이를 통해 자신이 추구한 것,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게 무엇이었는지 생각한다. 자신은 남들보다 무언가 더 큰 뜻을 쫓아 길을 걷고 있다고 항상 생각해 왔지만, 그 역시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고 보니 그 모든길이 결국 다를 바 하나 없었다.
그의 눈에 그토록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보였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나, 깨달음을 위한 자신의 구도자로서의 길이 순간 어느것도 더 무겁거나 가볍지 않았다.

“이 모든 단순하고 어리석은, 그렇지만 어마어마하게 강한, 억센 생명력을 지닌, 끝까지 강력하게 밀어붙여 확고한 자리를 굳히는 충동들과 탐욕들이 싯다르타에게는 이제 더 이상 결코 어린애 같은 짓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바로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무한한 업적을 이루고, 여행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무한한 고통을 겪고, 무한한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을 알았다. “

젊은이의 열정, 그리고 늙은이의 지혜로움은 마치 음과 양의 조화와 같다.
젊은이들에 의해 기성세대의 세계에 질문을 던지게 만들고, 다만 그들의 호기로움이 때론 너무 과하지 않게 늙은이들의 경험과 지혜가 그들을 제어할 수 있도록 세상은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보았을때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젊음을 잃어감에 슬퍼할게 아니라 자신이 옳바르게 늙어가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닐지 되돌아 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토록 사람들이 젊음에만 집착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은 젊은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바로 잡아주지 못하는 나이든 사람의 책임이 더 클지 모르겠다. 질문을 하고 혼란을 만드는건 애초에 젊은이들의 역할인 것이니까.

문득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이 영화에서도 젊은이와 노인 사이의 생각의 간극, 그리고 끝없이 챗바퀴도는 삶에 대해 이야기 한다.

헌데 여기서 헤세는 한 발짝 더 나아가 답을 내놓는다. 우리가 챗바퀴라고 말하는 인생이 사실은 답이라고, 진리는 누군가에게 배워서 전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것을 자신이 살아내고 경험함으로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따라서 똑 같은 반복 처럼 보일지라도 그렇게 직접 경험해내는게 맞는 거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돌고 도는 과정속에 우리가 항상 그 자리였는지, 무언가 발전이 있었는지, 그것은 모르겠다. 만약, 발전이라고 하면 그 발전의 기준은 또 무엇일까.

3.
헤세는 나를 괴롭히는 한 가지 질문을 남겨두었다. 그건 바로 ‘시간’이란 것은 결코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과거란 기억에 지나지 않으며 미래란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며, 완성을 향하여 서서히나아가는 도중에 있는 것도 아니네. 이 세계는 매 순간순간 완성된 상태에 있으며, 온갖 죄업은 이미 그 자체 내에 자비를 지니고 있으며, 작은 어린애들은 모두 자기 내면에 이미 백발의 노인을 지니고 있으며, 젖먹이도 모두 자기 내면에 죽음을 지니고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도 모두 자기 내면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반면 내가 그 동안 생각했고 추종 했던 것은 우리는 모두 자연의 하나의 시도이며 앞으로 그 시도들의 가능성들이 열려있다는 것이다.
헌데 헤세는 우리의 가능성들이 이미 우리의 일부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우리 안에 있던 것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 뿐이라는 거다.

헌데 도무지 내 머리로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과거는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미래가 내 안에 이미 있는 것일까? 현재 내 안의 모습들이 미래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기 때문인 걸까?

그는 돌맹이 하나를 예로들며, 이 돌맹이는 지금은 돌이지만 언젠가 흙이 될 것이고 그 흙에서 식물이 나고 짐승이 나고 사람이 날 것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이 돌맹이는 이미 흙이기도 하며, 짐승이기도 하고 부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항상 모든것이었다라고, 그리고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돌맹이 조차 사랑스러운 것이며, 만물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이다.

무언가 그만의 종교적인 색채마저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어쩜 이건 그가 생각하는 어떤 믿음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을 읽으며 다른 많은 사람들이 언급했던 것들이 겹치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시대적으로 헤세보다 조금 앞선 니체가 그러했고, 그보다 훨씬 뒤인 현대의 영화도 그렇고, 파울로 코엘료가 말하는 것들도 보였다.

사실 진리란 진리는 이미 소크라테스 시절에, 아니 어쩌면 그 보다 더 전부터 다 나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우리는 그 진리들을 스스로 깨닫는 시간을 반복하고 있는 것 뿐.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 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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